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에서 블리자드에 자리 잡기까지: TheBOy 국기봉 선수 인터뷰
8월 15일,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출시됩니다. 거의 20년에 이르는 스타크래프트의 역사를 돌아보기에 지금보다 적합한 때는 없을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스타크래프트에 입문했던 ‘TheBOy’ 국기봉 선수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국기봉 선수는 스타크래프트 입문 후 수많은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한국 최고 선수 반열에 올랐습니다.
몇 년 후, 국기봉 선수는 블리자드 코리아에 보금자리를 틀고 현재 스타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II e스포츠 관리를 지원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국기봉 선수가 프로 지망생을 시작으로 유명 프로 선수를 거쳐 블리자드의 e스포츠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까지의 여정을 들어보았습니다.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출시됐을 때, 어떤 점에 끌렸나요?
호주에 살 때, 레이싱 아케이드 게임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했어요. 1998년에 아케이드 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지더군요. 어디로 갔나 했더니, 다들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SCV와 마린의 멋진 움직임에 큰 감명을 받았고, 3일 넘게 매일 찾아가서 그걸 지켜봤죠. 처음에는 게임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참을 수 없게 되었죠.
스타크래프트로 전환하기 전에 레이싱 게임을 전문적으로 플레이하셨다고요?
1997년경에 아케이드 게임이 호황이었어요. 저도 아케이드 게임을 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죠. Daytona USA를 정말 기가 막히게 하는 친구와 대결을 했어요. 그 친구를 한번 이겨보고 싶어서 랩 타임을 단 0.01초라도 줄여보려고 엄청나게 연구했죠.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살던 도시에서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더라고요.
당시 매주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Daytona USA 대회가 있었어요. 매주 가장 빠른 랩 타임을 기록한 사람에게 약간의 상금과 상품을 줬는데, 항상 제가 우승했죠.
그러다가 프로 스타크래프트 선수가 되자 상금을 받고 차를 사게 됐죠. 저는 개조 차량에 정말 관심이 많았고, 드래그 레이스에 참가하기도 했죠. 프로 레이싱 선수로 전향하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국 레이싱 대회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었고… 결국 포기했어요.
스타크래프트 프로 선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렸습니까?
프로 선수가 되려면 평균적으로 1년 이상이 걸립니다. 하지만, 저는 Battle.net에서 얻은 명성 덕에 7달 만에 프로 선수가 됐죠. 8개월째에 매니저가 생겼고 후원도 받게 됐어요.
프로 선수가 되기 전에는 보통 하루 평균 8~10시간 정도 플레이했죠. 프로가 되고 나서는 적수를 찾을 수가 없어서 예전만큼 연습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대회 전에는 전략을 생각해 내려고 20~30게임씩을 소화하고는 했죠. 저만의 특별한 전술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메모도 엄청나게 했고요. 게임을 즐겼고 매일 3~4시간은 플레이를 했어요.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1999년이에요. 온통 신나고 새로운 경험이었죠. 신나게 게임을 하면서 돈도 벌었고, TV에도 출연했고, 팬도 생기고, 다양한 분야의 유명인도 만났어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제 사인을 받으려던 때도 있었죠. 제 경기가 처음으로 생중계됐던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PKO)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결승에서 지기는 했지만, 처음 8경기는 연승을 거뒀죠. 그 신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죠.
또 하나 확실하게 기억나는 순간은 미국 한인 PC방 그룹으로부터 미국에 초청받았을 때에요. 제 얼굴이 모든 미국 내 한국 신문에 실렸고 미국 한인 라디오에도 출연했죠.
자신의 최고 강점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특별히 잘 다루던 유닛이나 최초로 고안한 특별한 플레이 방식이 있었습니까?
저는 약한 유닛과 인기 없는 전략을 연구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어요.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는 것에 비해 어떤 유닛이나 전략이 더 약하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싶었죠. 정말 형편없어 보이는 유닛 조합이라도 진정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난 뒤에는 그 조합으로도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죠.
저는 히드라리스크를 잘 활용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히드라리스크"나 "살아있는 히드라" 같은 별명을 얻게 됐어요. 어떤 이들은 제가 제 플레이에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는 히드라"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살아있는 히드라"라고 불리기 시작한 후부터 히드라리스크 빌드를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히드라리스크를 사용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왠지 히드라리스크를 사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죠.
프로 선수 중에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였습니까?
1999년과 2002년 사이에 만났던 홍진호(‘YellOw’), 강도경(‘H.O.T-Forever’), 기욤 패트리(‘Grrrr...’), 이기석(‘SSamzang’) 등의 선수들과는 아직도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분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는 없습니까?
홍진호 선수와 강도경 선수의 춤과 노래가 담긴 은밀한 영상이 있습니다만, 두 분의 사생활을 지켜드리고 싶네요…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직업을 바꾸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프로 선수 당시 게임만 플레이하지는 않았고, 다양한 사업 기회도 엿봤죠. 당시 한국에서는 PC방이 부흥하던 시기였는데, 저는 그런 PC방을 홍보하는 이벤트를 개최했었죠. 결국, 다양한 홍보 이벤트를 개최했고 PC방 프랜차이즈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됐죠.
블리자드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셨나요?
경험이 쌓이자 큰 야망을 품고 벤처 회사를 차렸습니다. 하지만, 알파 개발 단계에 몇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제품을 출시할 수가 없었고 사업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했죠. 정말 뼈저린 실패였어요… 그렇게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블리자드에서 e스포츠 업무 담당을 채용하는 것을 봤어요. 스타크래프트의 열성 팬으로서 제 꿈과 열정을 펼칠 절호의 기회였죠.
블리자드 사내 스타크래프트 경기와 대회는 모조리 싹쓸이하셨다고요? 블리자드 사내에서 가장 강한 상대는 누구입니까?
처음 블리자드에 입사했을 때 많은 직원이 저에게 도전했지만, 모두 이겼죠. 요즘에는 실력이 대단한 직원이 몇 명 있고, 테란이나 프로토스로 플레이하면 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그로 플레이하면 아직 상대가 없어요. 많은 분이 제가 저그만 잡으면 사람이 달라진다고들 하더군요. 제가 항상 하는 농담이 있어요. 저는 저그의 화신이라서 마우스나 키보드에 손을 대지 않아도 그냥 이긴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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