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동 대 김택용, 최종 결전
일 년 전에 누가 제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스타크래프트의 전설적인 존재인 이제동과 김택용 선수에게 미국식 바비큐의 놀라운 맛을 소개할 기회를 얻게 될 거야'라고 말해줬다면 저는 아마 박장대소하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 됐네요. 이 두 전설적인 프로게이머는 블리즈컨 2017에서 일명 'Ultimate Title Fight'이라고 불리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이벤트 매치에서 총상금 25,000달러를 놓고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내년에 입대를 앞두고 있고, 이는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죠. 따라서 이번 경기가 대규모 상금이 걸린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경합을 벌일 몇 안 되는 마지막 기회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 또한 오래된 팬으로서 두 사람과 함께 식사한다는 건 큰 영광이었죠. 그러니 식사 중에 소스 범벅인 바비큐 립 한 대를 통째로 무릎에 떨어뜨렸을 때 얼마나 처참한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물론 두 선수는 친절하게 대응해주었습니다. 눈치채지 못한 척하더군요. 예의를 지키느라 심지어 웃지도 않았는데, 이는 김택용 선수가 사실상 세상 모든 일에 웃음을 터뜨리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이죠.
다행히 두 사람은 저보다 더 조심스러운 편이었고, 입고 온 옷(이제동 선수는 파리 브랜드인 A.P.C.의 스웨트셔츠, 김택용 선수는 미키 마우스를 살짝 비틀어 해석한 예술적인 상의)도 헤어스타일만큼이나 깔끔하고 흠잡을 데 없이 잘 유지했습니다. (김택용 선수는 붉은빛이 도는 곱슬머리를 세련되게 빗어 넘겼는데, 이 헤어스타일을 칭찬하는 시라도 한 수 쓰고 싶을 정도였죠.)
저희가 만난 곳은 애너하임 쇼핑몰에 있는 바비큐 전문 레스토랑이었습니다. 양지, 풀드 포크(잘게 찢은 돼지고기), 할라피뇨 맥앤치즈, 옥수수 빵, 푹 익혀서 뼈에서 살점이 저절로 떨어지는 립(갈비)을 접시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주는 곳이죠. 두 선수가 처음에 소스도 없이 맛을 보는 것을 보고 놀라 얼른 먹는 법을 보여주었더니, 이제동 선수는 풀드 포크를 바비큐 소스에 찍어 한 입 맛보고는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오오오오!"하며 소리쳤습니다.
두 사람은 다섯 시간 후면 이만한 챔피언급 선수에게도 꽤 큰 금액이라 할 수 있는 상금을 놓고 치열한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펼쳐야 합니다. 긴장되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 다 겉으로는 전혀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 정도라면 이 정도 긴장감은 일상적인 일일지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행운의 순간을 눈앞에 둔 기회를 빌려 두 사람에게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두 분은 자녀들에게 스타크래프트를 가르칠 생각인가요?"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이제동 선수는 게임으로 개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테니 가르치겠다고 답했습니다.
"아이가 테란만 고집하면 어떡하죠?"라고 묻자 웃음소리는 더 커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절대 안 된다"고 의사 표시를 하더군요. 이제동과 김택용 선수는 각각 저그와 프로토스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며, 적어도 스타크래프트 종족을 고르는 것만큼은 아이들도 꼭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어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의 앞날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두 선수 모두 말을 아꼈지만, 낙관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이제동 선수는 "e스포츠가 굉장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잖아요. 얼마든지 실력 있는 신인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죠."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차세대 플레이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나요?"라고 묻자,
김택용 선수는 "프로게이머를 직업으로 택하려면 아주 현실적이어야 해요."라고 말하면서, "이 방면에서 성공하려면 재능이 있어야 하거든요. 재능이 없다면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게 좋아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죠?"
김택용 선수는 잠깐 소리 내어 웃더니 고민해보는 눈치였습니다. 잠시 후,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변 사람들하고 비교해보면 알죠."라고 말했지만, 약간 씁쓸한 미소를 보니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경기 현장
이제동 선수와 김택용 선수가 무대에 올라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달콤 씁쓸한 기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승리를, 누군가는 패배를 기록하게 될 테니까요. 유명 캐스터 Tasteless가 선수를 소개하자 관중석을 가득 메운 팬들이 환호로 답했습니다. 두 선수는 부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이전에도 수없이 그래왔듯 헤드셋을 착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선수의 Ultimate Title Fight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서는 이제동 선수가 확실히 보였습니다. 굉장히 집중한 얼굴이더군요. 김택용 선수의 경우 모니터 위로 삐죽 나온 그 멋있는 헤어스타일 위쪽만 살짝 보일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머리 위로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선수들의 얼굴을 잡는 페이스캠 화면이 표시되는 덕분에, 사방을 끊임없이 살피는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저는 두 선수의 작지만 정밀한 고개 움직임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정밀한 기계로 작동하는가 싶을 정도였죠.
1경기는 이제동 선수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일찌감치 들어온 질럿 공격을 저글링 하나도 잃지 않고 물리쳐냈죠. 질럿을 컨트롤하는 플레이어가 김택용 선수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말 인상적인 출발이었죠. 하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이제동 선수는 김택용 선수의 강력한 매크로 컨트롤, 즉 대규모 군대를 구성하고 조종하는 능력에 뒤처지고 말았습니다. 김택용 선수는 이제동 선수의 러커밭을 뚫어내고 지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그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2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동 선수가 게임 중반에 강력한 히드라리스크 맹공을 펼치며 우세한 듯 보였습니다. 그 상태로 게임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김택용 선수가 두 번의 강력한 일격으로 게임의 흐름을 완전히 역전시켰죠.
김택용 선수는 우선 기지 바깥의 히드라리스크에 흠잡을 데 없는 사이오닉 스톰 공격을 퍼부어 히드라리스크 대부분을 말그대로 녹여 버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다크 템플러가 이제동 선수의 주 기지에 잠입하여 자원을 채취 중인 귀중한 드론을 다수 해치웠습니다. 이제동 선수는 병력와 경제 모두 뒤처진 상태로 겨우 몇 분간 더 버티다 결국 김택용 선수의 끈질긴 압박에 굴하고 말았습니다.
경기장은 우울한 분위기에 잠겼습니다. 아무리 열렬한 김택용 선수의 팬이라도 이제동 선수가 마지막 메이저 시리즈에서 3 대 0으로 완패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경기는 딱 그렇게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김택용 선수의 기세가 너무 좋았거든요. 제 옆에 앉아 있던 이벤트 매치 트로피 담당자가 무대 뒤편으로 불려갔습니다. 이대로 김택용 선수가 순식간에 3차전까지 이길 경우에 대비해서죠.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이제동 선수가 2연승할 테니까요!"라고 말했지만, 말하는 저조차 진심으로 그렇게 믿지는 않았습니다.
3경기에서는 이제동 선수가 게임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글링 4마리를 김택용 선수의 기지로 침입시켜 관중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이제동 선수의 폭군과도 같이 상대를 사납게 몰아붙이는 능력이 예전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라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제동 선수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저글링 컨트롤의 대명사로 여겨졌고, 당시에 이런 상태였다면 적의 일꾼을 끈질기게 괴롭혀 간단하게 승리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컨트롤은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법입니다. 2017년의 이제동 선수에게는 한때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인내력이 없었습니다. (왕년에는 몇 주에 걸쳐서든 하루에 무려 16시간씩 연습에 매진해 전설로 남았죠.) 그 결과, 저글링은 어느 정도 피해를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택용 선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싹 쓸어버렸습니다.
그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동 선수가 저글링을 더 보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김택용 선수에게 추가 공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첫 공격이 방어선을 무너뜨릴 만큼 충분히 피해를 입힐 가능성에 도박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김택용 선수가 최대한 맞서 싸웠지만, 저글링 군단이 김택용 선수의 확장 기지를 수차례나 공격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이제동 선수가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이로써 2 대 1이 되었습니다. 관중들은 다시 활기를 찾았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치고, 서로 끌어안기도 하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해설자 Tasteless와 Artosis는 무아지경이었죠. 이제동 선수가 해냈습니다! 한 경기를 가져갔어요!
4경기는 불리할 것으로 여겨지던 이제동 선수가 3경기 승리의 기세를 타며 (이제동 선수는 항상 관중을 사로잡을 줄 아는 선수였죠.) 그림으로 그려 붙인 듯 완벽한 히드라리스크 공격을 성공시키며 시작되었습니다. 김택용 선수로서는 위험이 따르는 빠른 다크 템플러 드롭 빌드를 시도한 것에 대한 응징을 당한 셈입니다.
이로써 갑자기 모두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이제동 선수가 한 경기라도 이길 수 있을까?"에서 "이러다 이제동 선수가 시리즈를 가져가는 거 아냐?"로 바뀌었습니다. 관중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장내에 물결처럼 퍼져나갔죠. 저는 이제동 선수의 페이스캠을 주시하며 힘들거나 지친 기색은 없는지 살폈습니다. 평소보다 눈이 더 빛나는 것 같지 않나? 입매가 살짝 비뚤어진 것이 불만스러움의 표시일까?
이제동 선수는 스타크래프트 프로 게이머로서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될지도 모르는 이번 최종전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 대담한 성격답게 일찌감치 저글링 공격을 퍼붓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걸고, 다른 전략으로 이행할 가능성 따위 전혀 남겨두지 않았죠. 대담한 전략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운이 따르지 않는 선택이었습니다. 김택용 선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공격은 실패하고, 이제동 선수는 GG를 선언했으며 무대는 환한 빛과 요란한 소리로 터져나가는 듯했습니다.
뒷이야기
이 기사를 마치며 몇 가지 잔상을 소개하고 싶네요.
김택용 선수가 커다란 꽃다발을 받아 들고 대충 한 번 향기를 맡아보는 시늉을 하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좀 더 오랫동안 향기를 맡습니다. 깜짝 놀랐지만 기분 좋은 표정이군요.
이제동 선수는 김택용 선수가 승자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근처에 서 있습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보안 요원이고 뭐고 다 물리치고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더니 사인 한 장이라도 받아보려는 절박한 스타크래프트 팬들 한 떼가 인터뷰가 마무리되자마자 두 선수를 에워쌉니다.
하지만 이 글에 가장 어울리는 엔딩 장면은 아무래도 이날 일찍, 바비큐 만찬의 잔해가 뒤덮인 식탁을 사이에 두고 이제동 선수와 김택용 선수와 마주 앉아 있던 그때일 것 같습니다.
제가 "인터뷰를 마무리하기 전에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라고 묻자,
두 사람은 팬들에게 감사하고, 이 자리에 있게 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분위기였습니다. 둘은 곧 예정된 군 입대에 대해 언급하며 아마도 이번이 훈련소로 떠나기 전 마지막 시합이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두 선수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동 선수는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를 응원해주세요."라고 전했습니다.
김택용 선수는 "전역해서 돌아왔을 때도 스타크래프트가 건재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