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스타크래프트의 로큰롤 시기, 개발 회고록

Blizzard Entertainment

때는 1997년이었습니다. 블리자드 아트 디렉터 샘와이즈 디디에의 65년형 머스탱에서 심상치 않은 매연이 뿜어 나왔죠. 디디에가 청테이프와 간절한 기도만으로 간신히 버티는 고대 유물 같은 차를 어둑한 창고에서 태양이 찬란한 캘리포니아 남부의 하늘 아래로 끌고 나왔을 때, 이제 청테이프와 기도만으로는 머스탱이 더 버틸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디디에는 차의 보닛을 열고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차에 불이 붙었던 거죠. 디디에는 운전석으로 달려 들어가 차고로 후진한 뒤 불이 붙은 부품을 뽑아내서 바닥에 던지고는 말했습니다.

"이 녀석들, 새 차를 사든가 할 것이지. 일하러 갈 때 차가 필요하니까 한동안 내 차를 몰고 다니다가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다니.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아차, 기름 넣는 걸 깜빡했네.' 같은 소리나 하는 이런 바보같은 녀석들. 매번 지치지도 않고 바보짓을 한다니까."

그 녀석들이란 일주일에 60시간 하고도 주말 반나절을 함께 일하는 20대 친구 무리를 말합니다. 이들은 스트리트 파이터사무라이 쇼다운을 플레이하고, 털털거리는 차를 땜질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방과 콘서트장에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친구들이었죠. 이 친구들이 한 조각 한 조각 다듬어지지 않은 조각을 붙여나가던 SF 게임이 실시간 전략 게임의 이정표가 되고 전 세계 e스포츠의 토대가 될 줄 그때는 몰랐죠. 그 게임의 이름은 바로 스타크래프트였습니다.

처음에는...

스타크래프트는 첫 선을 보이고 어느덧 19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특히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선수들이 수천의 팬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하고, 이 모습이 케이블 TV로 방송되고 있죠. 이처럼 변함없는 인기 때문에, 많은 분들께서 스타크래프트의 개발 과정이 마치 발레 안무처럼 예술과 기술이 환상적으로 결합되었을 것이라 기대하시기도 하지만... 사실은 술집 난투극에 더 가까웠습니다.

디디에는 말합니다. "개발하면서 고민하는 순간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죠. 이거 한 번 넣어보자. 그러면 펑! 하고 공성 전차가 나오고 전투순양함이 탄생했죠. 대체로 그런 식이었고, 수정 따윈 없었죠. '야, 우리 이거 다시 작업할까?' 같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두는 것에 가까웠죠."

트레버 제이콥스는 블리자드 초기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모든 테란 건물의 컨셉 아트를 담당했습니다. 제이콥스가 구조물을 3~4 페이지 정도 그려내면, 팀에서 마음에 드는 아트를 자르고 붙여 넣었죠.

"이건 무기고처럼 보이는데, 굴뚝을 추가해 볼까!” 디디에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합니다. "어, 이건 병영처럼 보이는데. 뭐, 토스터기에 더 가까운 것 같지만, 어쨌건 저걸 병영이라 부르자."

팀에서 전반적인 디자인 지침이 신속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테란 건물은 사각형에 투박하며, 프로토스 건물은 우아하면서 둥글고, 저그 건물은 약간 삼각형 형태에 가시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모양이라는 지침이었죠. 비록 지침이 정해지기는 했지만, 디디에나 제이콥스 같은 아티스트는 대체로 자신의 본능을 따르는 편이었죠.

"제가 전투순양함을 만들었죠. 당시에 사각형과 삼각형으로 작업하다가, 그렇게 정확할 필요가 없어 뭉개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모델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아주 작은 이미지로 렌더링되었죠.”라고 디디에는 말합니다. 몇 년 후, 전투순양함을 상징하는 귀상어 형태의 디자인은 디디에가 참여한 블리자드의 다양한 세계관 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 중 하나로 남게 됩니다.

스타크래프트의 세계는 창조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종족을 만들 당시, 저희는 온갖 아이디어를 던지고 그 중 어떤 아이디어가 괜찮은 지 지켜봤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저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죠. 바로 테란은 거친 느낌을 가진 종족, 프로토스는 원시적이고 강력하면서도 야만적이지는 않은 종족, 저그는 말그대로 군단의 느낌을 내는 종족으로 만들고 싶다는 점을요."라고 디디에는 말합니다.

팀은 방대한 SF 매체로부터 영감을 얻었지만, 그 중심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색채를 심었습니다. 프로토스는 기본적으로 전형적인 초지성적 "회색 외계인"을 기반으로 설계되었지만, 상당한 변화를 거쳤습니다.

"근육 하나 없이 빼빼 마른 조그마한 회색 외계인 대신 180cm 정도 키의 외계인을 만들었죠. 평범한 꼬맹이 회색 외계인과는 다르게, 우리가 만든 프로토스는 거대한 황금 갑옷을 두르고 싸우는 거죠."라고 디디에는 말합니다.

반면, 테란 종족에서는 모래바람 휘날리는 "거친 서부" 분위기를 우주로 가져오려 노력했습니다.

"저희는 범죄 조직과 시골뜨기, 미친 과학자의 느낌이 조금씩 섞인 지저분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추구했고, 이것이 바로 저희 식으로 해석한 우주 해병이었죠. 우주 연합이라 하면 대부분 세련된 모습이 익숙하겠지만, 저희는 반대로 거리의 범죄 집단이나 죄수 등의 모습을 그려냈죠."

스타크래프트의 거의 모든 유닛이 이처럼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암흑 기사요? 프로토스 닌자죠."라고 디디에는 말합니다. "알다시피 닌자들은 이따금씩 멋진 안면 마스크를 쓴 모습을 하고 있죠. 제라툴은 작고 낡은 천으로 코를 가리고 있고, 이 덕분에 마치 현명하고 신비로운 주술 닌자처럼 보이죠."

그렇다면 유령은 어떨까요? "유령은 정부가 만든 유전자 조작의 결과물이었죠. 당시에는 세계관이 그렇게 탄탄하게 구성된 편은 아니었어요. '어, 시험관에서 이런 요원들을 마구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방아쇠 두 개를 한 번에 당기도록 손가락도 여섯 개로 만들고!' 이런 식이었죠(하하). 손가락이 다섯 개라도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완전 바보 같았죠."

저글링은 어떨까요? "시네마틱 버전, 게임 팀 버전, 초상화 버전이 따로 따로 있었죠. 그래서 제가 매뉴얼에 들어갈 아트 작업을 할 때 저도 저만의 버전을 제안했죠. 당시 제가 작업했던 저글링 컨셉은 비디오 게임 특별전의 일부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몇 달 동안 전시되기도 했으니, 제가 작업한 버전이 최후의 승자 아닐까요?"

1996년 E3에서 블리자드가 스타크래프트를 대중에 처음 선보였을 때,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스타크래프트 아트를 전시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기자들은 그다지 감명을 받지 않았고, 스타크래프트의 초기 빌드가 워크래프트 II와 비슷하다고 빈정대며 "우주 오크"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디디에의 말에 따르면, 당시는 아직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하지 않았던 시기였고, 촉박한 마감일에 쫓기며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지근한 반응이 나온 것이라 합니다.

디디에는 그 때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 때 당시를 돌이켜보면, '이런, E3가 코앞이잖아. 뭔가 내놓기는 해야지.’ 이런 생각이었죠. 그리고 그 결과물은 말그대로 어떻게든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죠."

E3 후, 개발팀은 스타크래프트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블리자드 프로젝트에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었습니다.

기술 감독 밥 피치의 말입니다. "한 명 한 명 스타크래프트 팀에서 디아블로 팀으로 이동했죠. 저만 남을 때까지 모두요."

다음 두 달간, 피치는 전체 게임 엔진을 처음부터 다시 구축했습니다.

"당시 저희가 할 수 없었던 작업, 예를 들면 다른 유닛을 마주 본 상태에서 한쪽으로 움직이는 유닛 같은 것들을 목록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이 목록에 있는 모든 작업이 가능하도록 엔진을 다시 코딩했죠."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다른 스튜디오에서는 3D 그래픽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블리자드는 여전히 모델을 한 픽셀 한 픽셀 손으로 그렸죠. 디디에와 다른 아티스트들이 3D를 활용하는 실험을 했지만, 결과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처음에는요.

"3D로 처음 만든 유닛이 아마 골리앗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게임에서의 모습은 좀 바보처럼 보였죠. 얼룩덜룩한 덩어리 같은 느낌이 있었고, 렌더링한 뒤에 보면 항상 한 픽셀이나 두 픽셀 정도 더 두꺼워 보였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트 팀은 모델을 더 넓고 두껍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특유의 과장된 스타일이 탄생했습니다.

디디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시 PC의 모든 것은 현실적인 비율을 채택해 사진으로 찍은 듯한 느낌을 주거나 적어도 현실감을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별로 멋지지 않았죠. 저희는 워크래프트에서부터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총을 하나만 들게 하는 대신 뭉툭한 총 세 개를 들게 했죠.” 즉, 이른바 '블리자드 스타일'은 사물을 멋지게 표현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술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죠.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게임의 아트 제작 방향성이 바뀐 일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모델별로 최대 15가지 색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이 있었지만, 디디에는 신경 쓰지 않았죠. "여러분이 식당에 갔다고 해 보죠. 식당에서 종이 한 장과 조각난 크레용 한 박스를 줬고 가진 것만으로 뭔가 만들어야 한다고 가정하죠. 그리고 꽤 멋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평소에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색깔 조합을 사용했기 때문일까요?"

실리콘 & 시냅스

1993년, 21살의 아티스트 브라이언 소사는 오렌지 코스트 대학의 컴퓨터 연구실에서 구인 공고를 접했습니다.

이 공고는 "이 바이킹을 그릴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었죠. 그림 아래에는 실리콘 & 시냅스라는 비디오 게임 회사에 지원하기 위한 절차가 적혀 있었습니다.

소사는 바이킹을 그린 뒤 작품을 인쇄했고, 지원 공고에 나온 정보와 인쇄한 그림을 가지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지원하지는 않았죠. 몇 주 뒤, 소사는 앨런 애드햄이라는 사람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회사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인 애드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력서 잘 봤습니다. 같이 일해보시겠어요?"

"물론이죠!" 어리둥절하며 소사는 대답했습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소사를 대신해 지원했던 것이었죠.

소사가 말합니다. "어머니가 제 이력서 등에 대해 물어 보셨지만, 지원서를 대신 보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어머니가 보냈는지 물어봤죠."

("이야, 그거 재미있네요." 오늘에야 그 이야기를 들은 애드햄은 이야기합니다. "아마 당시에 저한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이겠죠.")

소사는 2주의 인턴 기간을 거쳐 직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당시, 실리콘 & 시냅스에서는 세 개의 게임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The Death and Return of Superman, Blackthorne 그리고 워크래프트라는 프로젝트였죠. 팀 인원은 적은데 비해 해야할 일은 많은 상황이었기에, 스튜디오 생활은 아수라장 일보 직전과도 같았습니다.

소사는 말합니다. "쉴 새 없이 일했어요. 너무 좋았죠. 모두 정신없이 일했어요."

아직도 블리자드에 근무하는 많은 고참 직원들 중 다수가 이와 유사한 입사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트레버 제이콥스는 나무를 수작업으로 자르고 발포 고무로 문자를 만드는 간판 가게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아티스트들 또한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 영화관 안내원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을 가지고있죠. 블리자드의 원조 "사운드 가이" 글렌 스태퍼드는 초기에 1주 단위 시험 채용으로 고용되었습니다. 첫 주를 공동 창립자인 마이크 모하임의 사무실에서 보낸 그는 PC 버전 길 잃은 바이킹을 위해 음악과 음향을 이식하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이후 몇 년간 회사는 이름을 두 번이나 바꾸게 됩니다. 잠시 동안 카오스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다른 회사의 상호와 겹치는 문제로 1994년 급하게 대안 투표를 했고, 그 결과 "블리자드"라는 이름이 선정되었죠.

소사는 투표에서 차점을 받은 회사명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앨런과 마이크가 후보 중에서 '블리자드'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요. 다른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죠. (웃음)"

애드햄에게 회사 이름에 대해 묻자 반색하며 대답했습니다. "'카오스'라는 이름은 게임 개발 과정이 기본적으로 혼란스럽고 이 과정을 포용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믿음을 대표했죠. 하지만 사용 정지 명령을 받아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동일한 기본 철학을 나타내는 눈보라, 즉 블리자드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죠. 눈보라는 강력함, 혼돈의 힘, 분노를 모두 담고 있지만, 사실 지나간 뒤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는 꽤 아름다운 것이죠."

애드햄에 따르면, 이러한 혼돈을 포용하는 것이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블리자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합니다. "이런 건 경영학 수업에서는 배울 수 없어요.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아무것도 안 돼 같은 방식과는 반대죠. 그저 직원들이 마음껏 도전하도록 일정 시간 자유를 주는 거예요. 개발자들에게 계속 반복을 거치며 개발할 충분한 자유가 주어지고, 이러한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 게임 디렉터가 합류하면 오버워치하스스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이 탄생하는 거죠."

스타크래프트 개발에는 이러한 자연 그대로의 자발적인 혁신이라는 철학이 구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게임의 다른 부분이 개발되기 훨씬 전에 시네마틱 영상 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닛 작업도 끝나지 않았었다니까요! 테란 유닛이 어떤 모습인지도 몰랐죠. 결국엔... 어떻게든 가보자고 했죠."

당시에는 중심 이야기 흐름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누구도 없었습니다. 애니메이터들이 직접 장면들을 끌어 모은 뒤 캐릭터와 주제를 거의 즉흥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소사는 당시 실무 회의 때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이 오갔다고 말합니다.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거죠?"

"아, 한 남자가 사막을 가로지르며 저글링을 훑어봅니다."

"좋아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죠?"

"어... 그 다음에는 저그가 쏟아져 나오는 거죠."

제한된 시간과 예산 때문에, 개발팀은 많은 영역을 즉흥적으로 작업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선임 작곡가가 된 글렌 스태퍼드 또한 어떻게든 스타크래프트의 음향 효과를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저그 음향의 많은 요소들은 제가 직접 낸 소리입니다.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뺨을 당기고 흔들며) 흐아우그후우우우~"

실제로,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한 유닛 목소리의 대부분은 블리자드 직원의 목소리입니다. 스태퍼드는 SCV와 프로토스 유닛 대부분의 목소리를 담당했습니다. (스태퍼드는 이후 스타크래프트 II에서도 SCV 역할을 맡았습니다.)

직원들이 담당한 스타크래프트 음향은 유닛 뿐만이 아닙니다. 블리자드 직원들로 구성된 밴드 Big Tuna는 자신들의 노래 중 힐빌리 투 스텝 계열 노래 하나를 스타크래프트 시네마틱 도입부에 자발적으로 제공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 노래가 너무 완벽했어요."라고 스태퍼드는 말합니다.

Play Nice; Play Fair

업무량이 엄청났지만, 스타크래프트 개발에는 즐거운 일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실 어딘가에는 항상 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명의 직원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 뒤로 (한동안) 사무실에서 술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직원들이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고, 할로윈 파티를 열고, 심야의 노래방 여정이 벌어지기도 했죠. (당시 회사 최고의 노래방 가수로 인정받았던 로만 케니는 The Darkness의 “I Believe in a Thing Called Love”라는 노래를 18번 곡으로 불렀고, 이 곡으로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하기도 했죠. 케니는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은 노래방에 간다고 합니다.)

개성이 강한 여러 직원이 회사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예를 들어, 트레버 제이콥스는 상사들로부터 완전히 상반되는 디자인 지침을 받았던 일을 기억합니다.

"작은 방에서 뭔가 작업하고 있었어요. 상사가 보더니 말했죠. '좋아, 멋있어. 회색톤에 날씬하게 해보자. 키 크고 날씬하게.'

그리고 나가면서 샘(디디에)과 하이파이브를 하더군요. '여, 친구!'

'안녕!'

상사가 간 뒤 새미가 오더니 말했더군요. '좋아, 좋아, 좋아. 좋은데 덩치는 키우고 키는 조금 줄이고 더 다채로운 색으로 하자고.'"

스타크래프트 세계에 퍼져 있는 게임 내 소품을 뭐라고 부를지에 대한 선의의 논쟁도 있었습니다. 텍사스에서 온 프로그래머는 "Doohickies"로 하자고 했습니다. 이 제안은 팀 전체가 반대했고 결국 "Doodads"로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회사에서는 장난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글렌 스태퍼드가 시네마틱 전문가 조이레이 홀의 PC에 가짜 바이러스를 심었습니다. 회사 컴퓨터가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된 직후였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실제 바이러스가 걸렸을 가능성은 아주 낮게나마 있었습니다. 스태퍼드는 플로피 디스크에 배치 파일을 저장하고 홀의 컴퓨터에 넣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컴퓨터를 부팅하면서 홀은 끔찍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Y를 눌러 하드 드라이브를 포맷하거나 N을 눌러 바이러스를 활성화하십시오."

스태포드가 출근했을 때 홀과 애드햄, 그리고 몇몇 직원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애드햄이 물었습니다. "글렌, 조이레이 컴퓨터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장난이 역효과를 낸 경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실의 한 엔지니어가 빈 코카콜라 캔을 모았습니다. 콜라 캔이 계속 쌓여 창문 두 개를 채웠습니다. 트레버 제이콥스와 브라이언 소사는 이 캔들을 그 엔지니어가 싫어하는 펩시콜라 캔으로 바꿔치기로 했습니다. 몇 주 동안 콜라를 수백 개나 사다 마셔야 했죠.

"펩시를 너무 많이 마셔서 배탈까지 났었죠."라고 제이콥스는 말합니다.

콜라 캔을 바꿔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던 주말 바로 전날인 금요일, 문제의 엔지니어가 퇴사해버렸습니다.

제이콥스는 이 이야기를 하며 정말 괴로워했습니다. "’지금 장난해?’ 이런 기분이었죠. 완벽한 계획이었다고요. 결국 펩시 캔으로 가득한 쓰레기봉투가 3~4개나 쌓였죠."

개발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게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타크래프트가 이렇게 성공하리라고는 블리자드의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게임이 출시되고 판매량이 치솟을 때조차 게임의 진정한 영향력을 팀이 미약하게나마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습니다.

제이콥스는 말합니다. "10,000명이 게임을 플레이하자 저희는 흥분했어요. 오 이거 엄청나잖아. 그러다가 한국에서 ‘빵’ 터졌죠. 저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적어도 제 수준에서는 말이죠."

디디에는 말합니다. "행운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게임이 계속 성장하더라구요.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 나갔죠."

피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합니다. "10만개 정도만 팔렸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수백만 개였죠."

1998년 겨울에 브루드 워가 출시되자 사무실 직원 모두가 브루드 워를 플레이하고 있었습니다. 애드햄이 나타나 모두 퇴근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제이콥스는 말합니다. "하지만 직원들은 모두 '잠깐만요, 몇 판만 더 하고 갈게요.'라고 대답했죠."

이러한 문화는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되돌아보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자 CEO인 마이크 모하임은 평소와 다름없는 긴 하루를 보내고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사무실 소파에 앉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돌아보았을 때, 마치 꿈처럼 느껴지시나요?

모하임은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시나요?

"아니요."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까?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고 들리는 소리는 에어컨 소리뿐이었습니다. 마이크의 책장에는 그동안 출시된 블리자드의 게임 상자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죠. 벽에는 검과 방패가 걸려 있었고, 사방에 작은 조각상과 피규어가 있었습니다.

"'기회'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재능 있는 인재를 찾아낸 것이 기회라면 기회였겠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희 스스로 행운이 오는 위치로 찾아 들어간다는 생각도 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희 모두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해요. 정말 뛰어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직원들이 모였어요. 스타크래프트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팀원들이 죽을 힘까지 다해서 만들었죠. 최선을 다해 만든 게임입니다."

마이크 모하임은 회사의 공동 창립자이며 1997년부터 부사장을 역임했지만, 스타크래프트 개발에도 실제로 참여했습니다. 유닛 동작, 아트 및 애니메이션 구현에 참여했죠. 자원 채취를 제어하는 코드는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또한, 치트 코드를 만든 이도 마이크 모하임이었죠. 블리자드 초기의 전략 게임은 모두 캠페인 레벨을 건너뛸 수 있는 치트 코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이크는 각각의 치트 코드를 Natalie Merchant 앨범의 타이틀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의 경우는 "오필리아"였죠.

"아무도 그걸 알아내지 못했죠."라고 말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마이크는 스타크래프트 팀이 출시 4개월 전까지도 게임의 경제 시스템을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미네랄과 베스핀 가스와 같이 스타크래프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심 시스템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완성되었습니다.

마이크는 말합니다. "스타크래프트를 개발할 때는, 온 세상을 짊어진 기분이었습니다. 게임을 완성할 수 있다는 보장 같은 건 전혀 없었죠."

그때가 그립기도 한가요?

"아, 물론이죠."

마이크가 갑자기 일어섰습니다.

"새미(디디에) 사무실에 자주 들러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곤 했죠. 새미 책상에는 고래가 있었어요."

마이크는 방 뒤쪽에 있는 자신의 책상 뒤로 가더니 약 30cm 길이의 장난감 범고래를 꺼냈습니다.

"저는 이 고래를 들고 어슬렁거리고는 했죠."

마이크는 고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래를 가지고 소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냥 제가 가져와 버렸죠."

그 후로 계속해서 마이크와 샘은 고래를 뺏고 뺏겨 왔습니다.

마이크는 탁자에 고래를 놓고 다른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e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1999년 마이크 모하임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프로 선수가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하는 것을 목격한 순간이죠.

"한국의 스타크래프트브루드 워 200만개 판매를 축하하는 행사에 참석했어요. 행사에서 스타크래프트 경기가 열리고 있었죠. 행사장에 내렸는데 사람들이 가득한 거예요. 당황해서 말했죠. '잠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다른 행사장에 온 거 아냐?'"

그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모두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보려고 왔던 거예요. 행사장은 완전 만원이었고, 관객들이 게임을 너무 잘 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죠. 선수가 SCV를 잃거나 사이언스 베슬이 파괴될 때면 환호나 탄성이 터져 나왔죠."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합니다.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어요. 저희 게임, 저희가 만든 게임을, 그렇게 높은 수준으로 플레이하다니, 너무 멋있었죠.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시청자가 있고, 멋진 플레이를 만든 선수들의 실력에 시청자들이 감탄하는 모습까지도 너무나 멋있었죠!"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 대한 논의가 한동안 블리자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아이디어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어렵지 않게 첫 번째 대회에 이를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스타크래프트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스타크래프트가 블리자드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마이크 모하임이 처음으로 직접 확인했던 바로 그 대회이죠.

마이크 모하임은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스타크래프트를 더 현대적으로 바꾸려 노력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앞으로도 계속 플레이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인터뷰가 끝난 뒤, 마이크는 문까지 배웅하면서 고래 장난감을 먼저 집어 들었습니다.

고래를 집으며 말합니다. "묵직한 게 딱 좋아요. 들어 보실래요?"